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니발 바르카 (문단 편집) ==== [[사군툼 공방전|사군툼 공격]] ====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을 시작으로 2차 포에니 전쟁이 개전했다. 한니발은 총사령관에 오르자[* 사료가 너무 없어서 한니발이 정확히 무슨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한니발이 당시 카르타고 육군을 총괄하고 있었기에 총사령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당대 카르타고 관직 표라도 있으면 짐작이라도 가겠으나 그런 건 없다.] 바로 [[로마 공화국|로마]]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그는 우선 스페인에 있던 사군툼이라는 도시를 포위했다. 사군툼은 당대 히스파니아의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로마의 동맹시였다. 이에 사군툼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로마의 대외 정책은 군사적 보호를 약속하여 동맹시를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동맹시인 사군툼이 함락당하면 로마의 대외적 위신이 크게 훼손될 수 있었다. 이는 스페인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감퇴하고 동맹시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마는 바로 전쟁을 하기보다 우선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병력이 갈리아인들을 견제하느라 북이탈리아 지역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한니발이 이를 예상하고 고의로 이때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라서 로마는 [[로마 원로원|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사절을 한니발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투가 급하다고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협상에 기질이 없는 한니발이 만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전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로마 사절단은 분노하여 카르타고 본국으로 건너가 항의했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카르타고 원로원도 만만치 않아서 로마의 위법 행위를 역으로 추궁했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의 조약에 따르면 로마는 사군툼과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되었다. 에브로 강을 경계로 양국의 세력권을 정한 뒤 이를 침범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이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인정한 일이 있었지만, 이는 카르타고 본국의 의견을 거쳐 비준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이렇게 근거를 들어 로마 사절단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의외로 강경한 카르타고의 대응에 로마 사절단은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로마 사절단은 전쟁이냐 사군툼 철수냐 양자택일을 강요하였다. 이는 로마 사절단이 카르타고의 질문에 해명을 하기보다는 전쟁 협박으로 무마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로마의 태도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말리지 않겠다. 전쟁을 선포하면 받아들이겠다."라고 강경하게 답변하였다.《[[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따르면 로마의 사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가 '''"전쟁과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라고 호령했는데, 카르타고 원로회 측에서 "그대가 주고 싶은 것을 줘라."라며 받아치자 파비우스가 '''"좋다, 전쟁을 주겠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한니발과 사군툼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로마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을 것임을 안 사군툼 시민들은 한니발에게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한니발은 "강화를 받아들이겠소.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을 그대로 성 안에 두고 옷 두 벌씩을 가지고 나오시오."라고 답했다. 사군툼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사군툼 시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재산을 모두 불태운 다음 결사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마침내 사군툼은 함락당했다. 모든 성인은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